Bhak, Ja E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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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자응(朴自凝)  1589 (선조 22) - 1645 (인조 23)     
       

박자응은 밀양 박씨로 자를 정언이라 하였다. 목천현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 과거에 응하여 급제하고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다. 교리는 홍문관의 5품관이나 옥당으로 불리우기도 하고 한림으로 불리우는 문관이며 누구나 선망하는 장래가 보장된 자리이다. 문한을 고루 갖춘 사람이라야 오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양반사회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벼슬이 있으니 재상 중에는 홍문과 대재학이며 아래로는 교리옥당이 문관들이 선망하는 자리이다. 

박자응은 처음부터 학문을 인정받아 환로가 순탄하였으나 때마침 광해혼조를 당하여 명과 절을 숭상하는 박자응인지라 화를 자초하지 않고서는 못배기었다. 

때마침 선조계비 인목대비를 폐위하여 서궁에 유폐하니 이후부터 인목대비를 서궁이라 호칭하였다.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영창대군을 시해하니 이것을 폐모시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광해군이 모후를 폐한 사건으로 패륜군주가 되어 반정의 빌미를 주었다. 북인일파는 인목대비를 폐하고자 상소를 올리거나 조의에 부처 의논을 진행시켰다. 인목대비는 부원군 김제남의 따님으로 선조의 계비로 궁중에 들어와 영창대군 남매를 낳았다. 대비의 연령은 광해군보다 연하의 어머니였다. 직접 낳지 않았어도 아버지의 육례를 갖춘 계모이면 어머니가 되는 것이 유교사회의 엄격한 법칙이다. 인목대비는 연소하지만 사리가 분명하고 명석하여 어떤 실수를 저지를 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쟁의 희생으로 폐모시제 사건이 진행된 것이다. 

선조는 13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후궁소생이며 영창대군이 적자로 처음 탄생하였다. 선조는 광해군을 못마땅히 여기던 중 적자를 탄생하였으니 폐세자 할 생각을 가지었다. 영의정 류영정 등에게 밀의하여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다. 이때 이이첨과 정인홍이 폐세자의 불가함을 상소하였다. 선조는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이이첨과 정인홍에게 허위소문을 퍼친 혐의로 귀양명령을 내리었다. 

이이첨과 정인홍은 차일피일 출발을 지체하다가 갑자기 선조가 승하하여 광해군의 명령으로 복직되었다. 선조가 돌아가자 재빠르게 왕위에 오른 후 정인홍과 이이첨을 등용하고 선조가 총애하던 서인세력을 몰아내었다. 우선 왕위계승에 불평이 많은 임해군을 죽이고 이이첨과 정인홍의 모사로 김제남을 역모로 몰아 처형하였다. 이에 나이 어린(8세) 영창대군을 강화에서 시해하였다. 이는 북인일파가 왕위에 불만을 느끼는 광해군을 충동하여 임금이 된 것이다. 폐모시제 사건을 일으켜 서인의 예기를 꺾고자 한 계책이다. 

이 계책에 말려든 광해군은 패륜의 임금이 된 것이다. 폐모의에 참석치 않고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간 사람도 많았다. 박자응은 본시 적극적인 사람이라 조정에 있으면서 폐모의에 참석하지 않고 상소를 올려 부당함을 간하니 그 언사가 파격하였다. 그 내용을 살피니 "23적신이 국모를 폐하고자 하니 천인공노할 패륜이오니 전하께서 만약 용납하시면 과격한 유생이 수백 명 떼지어 강상을 바로 잡고자 하면 상감께서는 어찌하겠습니까?"하였다. 

그후 어전에 등대했다가 폐모를 주장하는 흉소가 들어오자 박자응은 광해군의 면전에서 찢어 버렸다. 박자응은 광해군과 북인의 비위를 건드려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서궁에 대한 충성은 대단하여 항상 서궁쪽을 향해 앉으며 조석으로 기둥을 붙들고 탄식하였다. 

또한 호를 읍백당이라 하였다. 흰 것을 잡아당긴다는 뜻으로 항상 결백을 견지한다는 정신을 표출한 것이다. 

박자응이 인조반정 때까지 적소에 있다가 풀려났다. 그리고 다시 출사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박자응은 벼슬에 환멸을 느껴 고향 목천현 말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생을 시주로 자오하며 여생을 마치었다. 

 

http://www.cheonan.go.kr/cheonan/pride_4.asp?b_md=200&no=4912&page=6&keyfield=&keyword=

박자응(朴自凝)에 대하여

1589년(선조 22)∼1645년(인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 자는 정길(正吉), 호는 읍백당(挹白堂)영의정 승종(承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사원(金士元)의 딸이다.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세자시강원사서 및 홍문관부수찬을 거친 뒤 1617년에는 홍문관부교리·성균관직강·세자시강원문학을 역임하고 1618년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이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출론이 대두되자 신병을 핑계로 불참한 이유로 이듬해 고산현감(高山縣監)으로 좌천되었다.
1620년 영광군수를 거쳐, 그뒤 홍문관수찬·정자·교리·응교 및 헌납·지평·장령을 역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는 제주로 유배되고, 이재영(李再榮) 등의 공사(供辭)에 의하여 그의 급제가 차술(借述)임이 밝혀지자 삭과(削科)되었다.
1628년(인조 6) 진도로 이배된 뒤 이듬해 위리(圍籬)만 철거되었다.
 
 
사항

왕/년도 : 광해군(光海君) 5년

과거시험연도 : 1613 계축

시험명 : 증광시(增廣試)

등위 : 병과11(丙科11)

사항

성명(姓名) : 박자응(朴自凝)

자 : 정길(正吉)

호 : 파백(把白)

본관(本貫) : 밀양(密陽)

거주지(居住地) : 미상(未詳)

및 기타 사항

소과 : 1612(임자) 진사시

전력(前歷) : 사과(司果)

관직(官職) : 교리(校理)

가족사항

형(兄) : 박자흥(朴自興) 

부(父) : 박승종(朴承宗) 

조부(祖父) : 박안세(朴安世) 

증조부(曾祖父) : 박계현(朴啓賢) 

외조부(外祖父) : 김사원(金士元) 

처부(妻父) : 심협,정근(沈俠,鄭謹)

 

목천군 서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소사리, 산곡리 일부, 도전리 일부, 천안군 소동면 소시리, 전의군 북면 역리 일부를 병합하여 소사리 라 하고 목천면에 편입되었다. 소사리는 행정구역이 천안군, 목천군, 전의군, 풍세현 4개군의 경계도 있고 3개 군의 경계가 있어 소셋 소사에서 온 명칭이다.

고무태봉 : 소사리 북쪽에 있는 산.

곰직이고개 : 미소리고개라고도 하며 소사리에서 풍세면 곰직이로 넘어가는 고개.

굴머리 : 원당리라고도 하며 소식골 동쪽 진골짜기. 들머리에 있는 마을.

굴머리내 : 소식골내라고도 하며 소식골 동남쪽 고려성에서 발원하여 굴머리를 지나 응원천으로 들어가는 내.

대골 : 소사리 윗쪽에 있는 골짜기. 철일을 하던 곳이다.

띳골 : 부처당 밑에 있는 골짜기. 띠가 많다.

부처댕이 : 소사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 부처가 있었다.

애미기고개 : 소사리에서 연기군 전의면 애미기로 넘어가는 고개.

원당리(院堂里) : 굴머리 행인 객들이 쉬어가던 곳이다.

한티고개 : 소식골에서 성남면 한티로 넘아가는 고개.

살찬지(殺 地) : 교리 박자응과 헌남 심치청이 말을 세우고 언덕에 쉬었을 때 하 난의 호한이 말을 몰아 앞을 지나가는데 극히 무례하였다. 종자가 꾸짖어 말하기를 이 달관이 여기에 계신데 무례함이 이와 같으뇨 하였다. 이에 말이 놀라 항곡에 떨어져 죽으니 사람들이 그 자리를 살찬 지라 이름하였다. 이곳에 소사리 입구에 있다.